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프 란다우 (문단 편집) === 스탈린 독재정치에 대한 항의 및 숙청 === 란다우는 20대 중반에 이미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 [[하르키우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지만, 부모가 부르주아인 반동집안 출신이었고, 해외에 지인들도 많은데다가, 장기간 해외체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서방 간첩의 사보타지에 편집증적인 의심을 보인 소련 공안당국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란다우는 표르트 카피차의 요청을 받고 1937년 2월 우크라이나 하르코프에서 모스크바의 이론 물리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가 이직한 직후에 [[하르키우 대학교]]는 대숙청의 올가미가 덮쳤다.[* 당시 스탈린의 무리한 농업 집단화때문에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반스탈린-반소련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란다우는 그가 이직한 후 발생한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 사건[*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УФТИ)의 과학자들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전단을 발포한 사건.]에서 자신의 이전 동료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분노한 란다우는 1938년 4월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작성한 스탈린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자신이 편집하여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돌렸다. 란다우는 그 문건에서 '''저 인간백정(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랑 뭐가 다르냐'''고 서기장 동무를 깠다. 대숙청 와중에 이런 행동은 자살적인 것이었고, 즉각 이론 물리 연구소에서 해고 후 1938년 5월 27일에 구속되어 [[NKVD|내무인민위원회(NKVD)]]의 감방에 갇혔다. 하지만 1939년 5월 29일,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온 표트르 카피차[* 저온물리학 연구에 대한 공로로 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서기장 동무와 [[라브렌티 베리야]] NKVD 국장에게 란다우의 결백과 신분을 보증하며. '''란다우 죽으면 나도 때려친다'''는 편지를 보냈고 란다우의 재능을 아꼈던 [[닐스 보어]]도 코펜하겐에서 스탈린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아무 죄가 없어도 공안기관의 의심을 받으면 처형될 수 있는 대숙청기간에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인 학자가 "인민의 태양"인 스탈린을 파시스트 악당인 히틀러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빼도박도 못하고 사형을 받을 뻔 했으나 카피차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었던 보어까지도 구명운동에 나서자 스탈린도 란다우를 살려주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꼭 필요한 인재라 판단되면 살려주는 경우도 있었던 서기장 동무였기에 란다우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도 과학기술 분야는 이런 숙청의 물결에서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편이다. 서기장 동지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것은 소련의 공업화와 대조국전쟁 승리를 통한 초강대국으로의 발돋움인데, 이 과정에서 공업화의 선봉에 설 이런 과학기술 분야 인재들은 없어서는 안될 이들이라 이런저런 경로로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는 경우가 다른 업계에 비해 꽤 많았다. 또한 굴라그 내에서도 따로 연구할 수 있는 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서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창립자인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반동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과학자들의 탄원으로 20년형으로 감형되었음에도 끝내 옥사하는 등 눈물겨운 사연도 적지 않다.] 사실 란다우는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보어의 탄원도 효과가 있었겠지만[* [[부하린]] 같은 경우는 스탈린 본인의 친구였고, 서방의 여러 유명 지식인들이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벌였음에도 처형되었다.] 스탈린이 란다우의 구명운동에 나선 카피차를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이런 대역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카피차는 소련 성립 후 교육 받은 1세대 과학자로, 영국으로 유학가서 현대물리학의 대가였던 [[어니스트 러더퍼드]] 아래서 사사했고, 러더퍼드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도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자국에 주저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카피차는 공산주의가 싫어 서방에 주저 앉은 많은 러시아 과학자들과는 달리 영국의 유혹을 뿌리치고 소련으로 귀국했고, 소련에 현대물리학을 이식하는데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스탈린은 카피차의 연구활동을 돕기 위해 당시 농업실패로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와중에서도 3만파운드라는 거액의 외화를 들여 그가 일했던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에 맞먹는 과학실험 장비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945년 소련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스탈린 앞에서 카피차와 NKVD 부장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말다툼을 하는데, 스탈린은 카피차의 손을 들어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